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2차 투하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나가사키]] == Atomic bombing of Nagasaki 長崎市への原子爆弾投下 칼 스파츠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과 [[커티스 르메이]] 제21 폭격사령관, 폴 티비츠 제509 혼성비행단장, 파슨스 대령 등 원폭 투하 작전의 핵심 인물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을 성공시킨 후 괌에 모여 다음 작전을 논의했다. 윗 단락에 설명된 바와 같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대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바로 다음 원폭 투하 작전을 속행하기로 결정하고 [[워싱턴 D.C.]]에도 보고하였다. 당초 계획은 8월 11일 투하를 목표로 했고 앨버타 프로젝트의 과학자들도 이 일정에 맞추어 [[팻 맨]]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부터 일본 기상 상황이 안 좋다는 일기예보가 들어오자 티비츠 대령을 위시한 지휘부는 8월 9일까지 일정을 당기라고 명령했다. 앨버타 프로젝트 소속 과학자들도 어디까지나 현역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까라면 까]]야 했다. 2번째 원폭 투하 작전의 제1 폭격 목표는 고쿠라, 제2 목표가 나가사키였다. 목표가 2개로 줄어든 것은 사흘 전에 히로시마가 지도에서 지워졌기 때문. 따라서 작전에 투입된 B-29는 총 6대로 줄어들었다. 기본적인 작전의 얼개는 히로시마와 거의 동일했다. * '''기상관측기 2대'''. 앞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에놀라 게이는 나가사키 작전에도 출격했다. 제1 목표 고쿠라에 대한 기상관측이 임무였다. 제2 목표 나가사키 기상관측은 Laggin' Dragon(호출부호 빅터 95). * '''예비기 1대'''. 이오지마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역할은 풀 하우스(Full House, 기체번호 44-27298, 호출부호 빅터 83)가 맡았다. * '''타격대 3대'''. 원자폭탄 투하는 복스카(Bockscar, 기체번호 44-27297, 호출부호 빅터 77)가 담당했다. 위대한 예술가(The Great Artiste, 기체 번호 44-27353, 호출부호 빅터 89)의 기장이자 뛰어난 비행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던 찰스 '척' 스위니 소령이 임시로 복스카의 조종을 맡았다. 제393 폭격비행대대에서 토머스 패러비 소령과 폭격 솜씨 제일을 놓고 겨루던[* 그들은 [[헌팅]] 솜씨를 놓고도 치열하게 겨루는 사이였다.] 폭격수 '예술가' 커미트 비헌 대위도 복스카로 옮겨왔다. 원래 당초 계획에서 첫번째 작전 투하는 에놀라 게이, 두번째 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작전에서 위대한 예술가에 폭발 관측을 위한 과학 장비들을 잔뜩 설치해놓다 보니, 두번째 작전에서 이 장비들을 해체하고 다른 데 옮기기가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와 승무원 팀만 바꾼 것이다. 따라서 폭발 계측 임무는 당연히 위대한 예술가가 계속 담당했다. 사진 촬영과 관측은 Big Stink (호출부호 빅터 90)이 맡았다. 두 번째 작전에서는 윌리엄 파슨스 대령을 대신하여 [[https://en.wikipedia.org/wiki/Frederick_Ashworth#Project_Alberta|프레드릭 애시워스(Frederick Ashworth)]]가 폭탄 관리 담당으로 복스카에 탑승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뉴욕타임스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취재를 위해 복스카에 동승하였다.[* 이 기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인데, 맨해튼 계획이 알려지기도 전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상당부분 원자폭탄 실체를 밝혀나가던 유능한 기자였다. 맨해튼 계획의 수장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이 기자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계획 내부로 끌어들여서 아예 맨해튼 계획 홍보를 맡겨버렸다. 윌리엄 로렌스 기자는 원자폭탄의 성공/실패 등등 각각의 상황에 대비하여 수십 개의 보도 자료를 미리 준비했다.] || [[파일:b29_64.jpg|width=100%]] || || B-29 "Bockscar" 일련번호 44-27297,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 [[팻 맨]]은 폭축형, 내파형 원자폭탄이었으므로 [[리틀 보이]]와 달리 B-29가 이륙 중 추락하더라도 유폭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팻 맨은 조립 및 장전을 마친 상태로 복스카에 적재되었다. 다만 앞 단락에서 서술된 안전 장치(초록색/붉은색 플러그)는 리틀 보이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있었으며, 폭격 직전에 수동으로 해제해야 했다. 급하게 준비를 한 탓이었는지, 두번째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시작부터 문제를 드러내었다. 작전 시작 직전의 최종 검사에서 복스카의 예비 연료 펌프가 고장 났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장으로 약 640갤런(약 2,400리터)의 연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작전 계획대로 일본까지 왕복 비행할 수는 있었지만 매우 빠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펌프를 교체하려면 또 몇 시간이 소요되고, 이미 팻 맨을 탑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티비츠 대령은 그냥 작전 속행을 명령했다. 문제는 계속 이어졌다. 타격대를 구성하는 3대는 심야에 티니안 기지를 이륙한 다음 각자 날아가다가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의 [[야쿠시마초|야쿠시마]]에서 규합을 하기로 했다. 사흘 전 히로시마 작전에서도 에놀라 게이, 위대한 예술가, 빅터 91은 일출과 동시에 규합점이었던 이오지마 상공에서 정확히 만나 타격대를 구성하여 히로시마로 향했다. 그런데 8월 9일 작전에서는 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Big Stink가 항로와 고도를 잘못 선택하여 규합에 실패하였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Big Stink는 당초 계획 고도보다 9,000피트(2,700m) 가량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규합 항로도 야쿠시마 상공에서 당초 계획했던 패턴 비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타격대 규합 실패는 사실 거의 미스테리에 가깝다. 나름 맹훈련을 거듭했던 509 혼성전대의 승무원들이 이런 초보적인 고도/항로를 잘못 잡는 실수를, 그것도 원자폭탄 실 투하 작전이라는 중대한 작전에서 저질렀다는 것은 뭐라 이유를 대기조차 어렵다.] 전대장인 폴 티비츠 대령은 타격대 규합에 15분 이상을 소요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복스카를 조종하는 척 스위니 소령은 Big Stink를 기다리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무려 40분을 야쿠시마 상공에서 소비하고 말았다. 그동안 목표 기상 보고가 들어왔는데 [[코쿠라시|고쿠라]]는 아침 안개가 끼어있지만 곧 쾌청해질 것으로 기대, 나가사키 역시 아침 안개가 걸려있고 구름 2/10으로 비교적 쾌청이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 소령은 제1 목표 고쿠라를 폭격하기로 하고, 위대한 예술가만을 대동하여 고쿠라로 향했다. 그런데 복스카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기상 보고와 달리 안개가 계속 끼어있고, 더군다나 전날에 제21 폭격사령부의 B-29 폭격대가 인근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한 여파로 짙은 연기가 끼어있어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고쿠라 상공을 덮고 있던 이 연기에 대해서는 2014년에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히로시마 폭격 이후 "B-29 한두 대가 날아오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특수폭탄 폭격이다."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고쿠라에는 제철소와 무기 공장 등도 있어서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8월 9일 아침 소규모의 B-29들이 고쿠라로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은 야하타 제철소에서 직원들이 드럼통에 대량의 [[타르|콜타르]]를 태워서 연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증언도 있으니 검증되지 않은 설이라는 것이다. [[https://detail.chiebukuro.yahoo.co.jp/qa/question_detail/q13132421978|관련 일본 기사]].] 복스카는 고쿠라 상공을 3번이나 폭격 항정(bomb run)[* 폭격 항로와 고도를 잡고 폭격수가 조종 권한을 인계 받아 노든 폭격 조준기로 목표를 찾으면서 비행하는 것을 말한다.]으로 비행하였으나, 안개와 연기로 결국 육안 목표 확인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무려 5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이 와중에 통신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히로시마 폭격 때는 에놀라 게이에 탑승)는 인근에서 일본군 요격기의 활동을 통신 감청하고 경고를 발령했다. 더 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척 스위니 소령은 제2 목표인 나가사키를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고쿠라는 2번이나 원자폭탄 폭격 대상지에 올랐음에도 이를 모두 피하는 행운의 도시가 되었다. 약 20분의 비행 후에 복스카는 나가사키 상공에 도달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기상 보고와 달리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연료는 부족해지고 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척 스위니 소령은 폭탄 담당 애시워스와 상의한 뒤 티비츠 대령의 엄명을 어기고 레이더 조준 폭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결정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만약 폭탄 투하에 실패하면 기체의 안전과 착륙 중량을 위해서 그 귀중한 원자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고쿠라와 달리 운이 없었다. 순간 구름이 열리면서 나가사키를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맑은 개구부 구역이 드러났다. 일본 제국 군부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복스카가 규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상층부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소련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때문에 [[역사는 반복된다|이번에는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습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youtube(-KISiBHxv40)]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복스카가 투하한 2번째 핵폭탄이 폭발하였다.'''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 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이름부터 넓은 섬(広島)일 정도로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1/4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3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피해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https://www.google.co.kr/maps/place/Hypocenter+Cenotaph/@32.772137,129.8606754,4182m/data=!3m1!1e3!4m5!3m4!1s0x356aacd132c372a7:0x2429ffbe951d46b6!8m2!3d32.7737374!4d129.8632372?hl=ko|구글 지도로 보는 폭심지와 주위 지형]].] 그러나 '''그것은 히로시마에 비해 피해가 줄었다는 것이고''', 원자폭탄으로 인한 위력은 나가사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수많은 인원이 단 한 번에 소탕되었다. ||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1_1280.jpg|width=100%]] || ||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전, 이후의 모습 || 한편 타격대의 혼란은 원폭 투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규합에 실패해 가고시마 남쪽에서 헤매고 있던 빅 스팅크는 나가사키 시에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멀리서 관측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관측과 촬영을 시작하였다. 한편 복스카는 연료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 계획은 비상 상황이 생기면 항로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에 착륙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거기까지도 갈 연료조차 없었다는 것.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는 이에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왔던 [[오키나와]]로 가서 비상 착륙을 하기로 한다. 복스카가 오키나와 욘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단 한 번의 착륙 시도만 가능할 정도의 연료가 남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 관제소에서는 복스카의 착륙 요청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복스카는 플레어를 있는 대로 쏘아올리고 그냥 욘탄 비행장에 강행 착륙을 감행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활주로에 접근하다가 엔진 하나가 연료 부족으로 꺼졌고, 착륙 활주하다가 엔진 하나가 더 꺼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추락하거나 착륙하다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착륙한 게 기적이었다. 복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연료를 다시 보급 받고 겨우겨우 티니안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혼란'은 끝까지 계속되었는데,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최초 보도에서 자기가 탑승했던 폭탄 투하한 기체를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보도해버린 것이다. 작전 직전에 비행팀이 서로 교체된 것을 기자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제일 불쌍한 건 자기 이름 붙은 기체 빼앗기고 관측 비행이나 해야 했던 복스카 원래 기장 프레드릭 복스 대위였다.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 설계 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 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 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 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3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플루토늄 코어가 24시간 교대근무를 해도 본토에서 13일쯤에 제작 완료될 예정이었고, 코어를 제외한 부분은 이미 티니안에 배달되어있던 상태였으나 그걸 조립하는 시간까지 합해서 작전 투입은 19~20일쯤에나 가능하다는 예상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가능했다.[* 여담으로 이 3번째 폭탄에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지다가 종전으로 안 쓰이게 된 플루토늄 코어는 이후에 실험용으로 쓰이다가 2번의 사고([[해리 K. 더그힐란 2세]] 피폭 사건, [[루이스 슬로틴]] 피폭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그 후에 별칭 데몬 코어라는 별칭을 받았다). 이후 [[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의 찰리 실험에 쓰일 예정이었다가 찰리 실험이 취소된 후 다른 코어에 쓰이기 위해서 분해되는 것으로 최후를 맞았다.] 첫 핵 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